영국계 정착민(British settlers)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등 영국 식민지에 이주·정착한 영국 출신 이주민들을 통칭한다. 이들의 이주는 영제국의 영토 확장 정책, 본국의 경제적 압박, 새 땅에 대한 기회주의적 기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뉴질랜드에서는 마오리어로 파케하(Pākehā)라는 표현이 유럽계—특히 영국계—정착민을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했다.[1]

1. 뉴질랜드 정착의 배경

유럽인이 뉴질랜드를 처음 목격한 것은 1642년 네덜란드 탐험가 아벨 타스만이었으나, 실질적 접촉을 연 것은 1769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이었다. 쿡의 항해 이후 포경업자·물개 사냥꾼·선교사 등이 뉴질랜드 해안에 산발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2] 조직적 이주는 1840년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체결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영국 왕실은 이 조약을 통해 뉴질랜드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고자 했으며, 뉴질랜드 컴퍼니(New Zealand Company)가 영국 본국에서 이주민을 모집해 뉴질랜드에 보내는 사업을 추진했다.

2. 와이탕이 조약과 갈등

와이탕이 조약(1840년 2월 6일 서명)은 마오리 족장들과 영국 왕실 대표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영어본과 마오리어본 사이에 '주권'과 '통치권' 개념에 관한 번역 차이가 있었고, 이 차이가 이후 수십 년간 토지 분쟁과 무력 충돌의 씨앗이 되었다.[3] 정착민 수는 1840년 이후 급격히 늘어나 1860년대에는 마오리 인구를 추월했으며, 이 과정에서 마오리는 1900년경까지 원래 땅의 약 85%를 잃었다. 이에 따른 저항은 뉴질랜드 전쟁(1845–1872)으로 불리는 일련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2]

3. 정착민 사회의 형성

영국계 정착민들은 영국의 법·행정·언어·종교를 뉴질랜드에 이식했다. 크라이스트처치·웰링턴·더니든·오클랜드 같은 주요 도시가 영국계 이주민의 계획 정착지로 건설되었으며, 특히 더니든은 스코틀랜드계 정착민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정착민들은 입헌군주제 전통을 가져왔고,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에 기반한 의회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4] 한편 영국계 정착민 문화는 럭비 유니온 같은 스포츠를 보급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4. 현대적 의미

오늘날 뉴질랜드에서 파케하(영국계·유럽계 뉴질랜드인)는 전체 인구의 약 7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민족 집단이다. 한편 와이탕이 조약은 현재 뉴질랜드 법률 체계에서 '건국 문서'로 공식 인정받고 있으며, 마오리와 파케하 사이의 파트너십 원칙을 명시한 문서로 계속 재해석되고 있다.[3]

5. 관련 문서

[1] Te Ara Encyclopedia of New Zealand, "Early Pākehā land settlement", Tteara.govt.nz(새 탭에서 열림)

[2] NZ History, "History of New Zealand 1769–1914", Nnzhistory.govt.nz(새 탭에서 열림)

[3] Waitangi Tribunal, "The arrival of the Pākehā to New Zealand", Wwww.waitangitribunal.govt.nz(새 탭에서 열림)

[4] EBSCO Research Starters, "Colonization of New Zealand", Wwww.ebsco.com(새 탭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