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劉知遠, 895~948)은 오대십국 시대 후한(後漢)을 세우고 947년부터 이듬해까지 다스린 황제다. 후한은 한나라의 계승국을 자처한 유씨 왕조였지만, 전한·후한(동한)이나 삼국시대 촉한과는 다른 10세기 정권이다. 후대 사서인 《구오대사》는 그의 즉위 뒤 휘가 고(暠)로 바뀌었다고 기록한다. 유지원과 유고는 한 인물이며, ‘후한 고조’는 묘호에 따른 호칭이다. 사서는 그를 사타부 출신으로 적었다.[old-history]

유지원은 후당 명종 이사원의 휘하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구오대사》는 그가 전투에서 석경당에게 말을 내주어 위기를 넘기게 한 일, 석경당이 후당에 반기를 들어 후진을 세울 때 모의와 군무를 도운 일을 전한다. 이후 그는 여러 절도사 직책과 금군 지휘관을 거쳐 하동 절도사가 됐다. 이는 절도사와 군대가 중앙 정권의 존립을 좌우하던 시기의 경력이다.[old-history][cambridge]

후진 출제 석중귀가 거란에 패하고 947년 초 개봉이 점령되자 중원에는 권력 공백이 생겼다. 유지원은 태원에서 신하들의 권진을 받아 황제에 올랐고, 처음에는 후진의 연호인 천복을 이어 썼다. 《자치통감》은 그가 ‘진을 차마 잊지 못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한다. 같은 해 거란군이 북쪽으로 물러난 뒤 유지원은 개봉에 들어가 국호를 한으로 고치고 사면을 선포했다. 후한은 거란의 남하와 후진 붕괴 뒤 세워졌고, 유지원은 기존 관료와 군 지휘관을 다수 유임했다.[chronicle-286][chronicle-287]

후한은 한이라는 국호를 사용했지만 전한·후한의 복구가 아니라 10세기의 새 정권이었다. 《구오대사》는 유지원의 계보를 기록하지만, 그 서술만으로 혈통을 독립 확인된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다. Walton은 유지원이 태원에 사타계 기반을 두었다고 설명한다.[old-history][cambridge]

유지원은 948년 사망했고 아들 유승우가 뒤를 이었다.[old-history-100] 《구오대사》의 연대기에는 관료·군권 배치와 지방 세력의 복속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유지원의 사망 뒤에도 후한은 존속했지만, 951년 곽위가 후주를 세우며 무너졌다.[chronicle-290] 왕조 존속 기간과 유지원의 개인 재위 기간은 구별된다.[old-history][chronicle-287][cambridge]

《구오대사》와 《자치통감》은 후대에 편찬된 사서로, 사실 기록과 왕조 계승에 관한 편찬자의 평가가 함께 담겼다. 유씨의 한 왕실 계보를 동시대에 독립 확인된 혈통 사실로 단정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old-history][chronicle-286]

화책영시의 공식 작품 소개에 따르면 드라마 《태평년》(太平年)은 오대십국 말기부터 북송 초기를 배경으로 하며, 중심 이야기는 오월국 왕 전홍숙과 ‘납토귀송’이다. 공식 소개는 작품 설정이지 역사 사료가 아니다. 즉위 경위와 죽음의 묘사는 사서와 대조하고, 장면·대사는 드라마의 재현으로 구분해야 한다.[taip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