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는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세운 나라이다. 견훤은 892년 무진주에서 자립하고, 900년 완산주로 도읍을 옮겨 후백제왕을 칭했다.[3] 완산주는 지금의 전주에 해당한다.[1]

1. 개요

후백제는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며 관직을 마련하고 정개라는 연호를 사용했다.[1][3] 견훤은 의자왕의 울분을 씻겠다고 표방했고, 이로써 나라의 정통성을 옛 백제와 연결했다.[1][3]

후백제는 2대에 걸쳐 45년간 존속한 뒤 936년 고려에 멸망했다.[1][3] 그 역사는 신라 말 지방 세력의 성장과 고려의 통일 과정이 맞물린 후삼국 시대의 한 부분이었다.[2][4]

2. 건국 배경과 세력 형성

신라 말에는 진골 귀족 사이의 정권 다툼이 이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졌다. 이 틈에서 각지의 지방 세력가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이러한 호족 세력의 대두는 후삼국 성립의 배경이 되었다.[2]

견훤은 신라 서남해의 방수군에서 활동한 뒤 무리를 모아 왕경 서남쪽 주현을 공략했다. 기록에 따르면 한 달 사이 호응한 무리 5,000명을 모아 무진주에서 왕을 자칭했다.[3] 초기 세력 범위와 공략 지역의 위치는 강주·승주 일대 또는 광주·순천 일대라는 견해가 있어 단정하기 어렵다.[3]

3. 도읍과 정치적 표방

견훤은 900년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고 후백제왕을 자칭했다.[1][3] 그에 앞서 무진주에서 왕을 자칭할 때는 신라 서면의 군사 지휘관 등을 포함한 긴 관직 칭호를 내세웠다고 전한다.[3]

견훤은 신라에 멸망한 백제의 의자왕이 품은 울분을 씻고 백제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1][3] 후백제는 관직을 마련하고 정개라는 연호를 사용했지만, 건국 과정과 초기 칭호에는 복잡한 기록과 해석의 쟁점이 남아 있다.[1][3]

4. 후삼국의 전쟁과 외교

후백제는 고려·신라와 전투와 화친을 거듭했다. 925년 조물성 전투에서 견훤과 고려 태조는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약속하며 화친을 맺었다.[3][4] 고려에 볼모로 간 견훤의 조카 진호가 이듬해 갑자기 죽자 견훤도 고려의 왕신을 살해했고, 화친은 깨졌다.[3]

927년 견훤은 신라 왕경을 공격해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했다.[3][4] 후백제는 중국의 오·월과 교류했다고 전하며, 전북 지역에서는 도성 방어와 관련된 성곽 유적, 초기 청자 가마터, 해상 교류 거점으로 제시된 선유도 유적 등이 확인되었다.[1] 이 유적과 생산 흔적은 당시의 해상 교역과 문화 교류를 살펴보는 사례로 다뤄진다.[1]

5. 왕위 계승 갈등과 쇠퇴

견훤은 여러 아들 가운데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신검과 다른 왕자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맞서면서 왕실 내부에 계승 갈등이 벌어졌다.[3]

935년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약 3개월 뒤 금성으로 달아나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요청했고, 고려에 귀부했다.[3] 한편 후백제는 고창전투와 운주성전투 등에서 패하면서 고려에 주도권을 내주고 세력이 약화되었다.[3][4]

6. 멸망과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고려 태조 왕건은 호족 연합 정책과 친신라 정책을 추진하며 후삼국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고려는 후백제와 화친을 맺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세력을 넓혔고, 고창전투 등에서 후백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4]

견훤이 고려에 귀부한 뒤 고려는 936년 후백제를 공격했고, 신검은 일리천전투에서 항복했다.[3] 후백제의 멸망으로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흡수하는 후삼국 통일 과정이 마무리되었다.[4]

7. 관련 문서

8. 인용 및 각주

[1] Wwww.jeonbuk.go.kr(새 탭에서 열림)

[2] Ccontents.history.go.kr(새 탭에서 열림)

[3] Eencykorea.aks.ac.kr(새 탭에서 열림)

[4] Eencykorea.aks.ac.kr(새 탭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