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선언서는 1776년 7월 4일 발표되어 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임을 선언하고, 영국과의 모든 정치적 관계를 해소한다고 밝혔다.[6] 선언은 인간의 평등과 생명·자유·행복 추구의 권리, 정부 권력의 정당성이 인민의 동의에서 나온다는 원칙을 천명했다.[1][6]
1. 개요
2. 자연권과 정부의 정당성
선언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제시하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들었다.[6] 이 권리의 근거를 국왕이 베푸는 특권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속하는 자연권으로 설명한 점은, 특권 신분의 권리를 다룬 앞선 문서들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소개된다.[5]
정부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조직되며,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서 나온다는 것이 선언의 논리다.[6] 따라서 정부의 목적과 인민 주권은 연결된다. 선언은 정부가 그 목적을 파괴할 때 인민이 정부를 변혁하거나 폐지하고, 안전과 행복을 보장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6]
선언은 정부를 일시적이거나 가벼운 이유로 바꾸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이 악폐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오랜 학대와 착취가 같은 목적을 추구하며 인민을 절대 전제 정치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분명히 드러낼 경우, 정부를 타도하고 미래의 안전을 위한 새 보호자를 마련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주장한다.[6] 이 논리는 자연권을 정부 권력의 한계와 연결한다.[4][6]
3. 영국 국왕에 대한 고발
선언의 고충 부분은 독립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왕의 행위를 나열하는 고발 형식으로 구성되었다.[3][6] 열거된 내용에는 입법 기관 해산, 사법 제도 수립 방해, 입법 기관의 동의 없는 상비군 주둔, 동의 없는 과세 등이 포함된다.[6]
고충은 연대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어지는 문장마다 “국왕은”에 해당하는 표현이 반복된다.[3] 이 반복은 고발 내용을 차례로 쌓아 올리고 국왕의 책임에 주의를 모으는 효과를 낸다.[3]
이처럼 선언은 추상적인 권리 원칙만 제시하지 않고, 식민지인들이 주장한 구체적인 피해를 독립의 근거로 연결한다.[6] 본문에서 입법권과 사법권, 군대와 세금의 문제가 함께 다뤄지는 방식은 고발의 누적을 드러낸다.[3][6]
4. 독립 선언과 미국 혁명
독립 선언은 전쟁의 종결을 뜻하지 않았다. 식민지군의 투쟁이 이어진 끝에 13개 식민지는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다.[1] 선언에서 밝힌 독립의 원칙은 이후 전쟁의 결과와 함께 미국 건국 과정의 일부가 되었다.[1]
국사 교과서는 미국 혁명을 본국으로부터의 식민지 독립으로 설명하면서, 선언과 헌법의 원리에 비추어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도 지녔다고 평가한다.[1] 이 설명은 사건의 정치적 목표와 그 원리에 담긴 민주주의적 주장을 함께 다룬다.[1]
1787년에는 삼권 분립에 입각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미국 연방 공화국이 세워졌다.[1] 이 순서는 1776년의 선언, 독립전쟁과 1783년의 조약, 헌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건국 과정의 흐름을 보여 준다.[1]
5. 사상적 영향과 역사적 의의
존 로크의 사상은 선언의 지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소개된다. 대중 주권은 정부가 자신을 세운 다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원리다. 로크는 정부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시민이 반란을 일으키고 통치자를 제거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4] 해당 설명은 로크의 사상이 독립선언서와 이후 미국 헌법에 영향을 주었다고 서술한다.[4]
선언은 권리의 근원을 국왕의 하사품이 아닌 자연법에 두고, 모든 사람의 보편적 권리를 내세웠다.[5] 이러한 권리 원리는 특권 계급에 대한 복종이 널리 퍼져 있던 유럽에서 혁명적인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평가가 제시된다.[5]
미국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지녔으며, 유럽 대륙, 특히 프랑스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설명된다.[1] 한 인권 관련 설명은 독립선언서의 평등과 보편적 권리 주장이 유럽 시민혁명 전개에 자극을 주었다고 서술한다.[5]
6. 선언의 한계와 비판
평등과 자유를 내세운 선언이 발표될 당시 미국에는 노예제가 존속했다. 선언의 작성자인 토머스 제퍼슨도 노예 소유주였으며, 독립투쟁 중 자유를 주장하면서 노예제를 유지하는 모순을 지적하는 비판이 제기되었다.[5]
독립전쟁 발발 후 대륙회의가 아프리카와의 노예무역을 금지했지만, 대농장주와 해운업자들의 반발로 독립선언에 노예제 반대 내용이 삽입되지 못했다. 노예의 수입과 매매도 계속되어 금지령은 무의미해졌다.[5] 이 경위는 선언의 보편적 인권 원리와 당시 사회 현실 사이의 간극을 보여 준다.[5]
참정권과 공직 진출에도 제한이 있었다. 재산 자격으로 참정권을 제한했고, 공직에는 더 높은 재산 자격이나 종교 자격을 요구한 사례가 제시된다.[5] 이런 제약은 선언이 내세운 평등과 현실의 제도 사이에 간극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5]
7. 관련 문서
- 미국 혁명
- 미국 독립전쟁
- 버지니아 권리장전
- 미국 헌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