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이 1933년 집권한 뒤 1945년 5월 연합군에 패배할 때까지 독일을 지배한 정권을 가리킨다.[2][3] 이 시기 독일은 일당 독재와 히틀러를 정점으로 둔 지도자 중심의 위계 체계를 세웠다.[3]
1. 개요
2. 정권의 이념과 통치 체계
나치 이념의 중심에는 민족사회주의와 극단적 반유대주의, 인종 차별, 팽창주의가 있었다. 나치 정권은 히틀러를 권위의 정점에 놓는 퓌러러 원리를 통치 원리로 삼았다.[3]
이 원리에서는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지도자의 의지는 절대적인 것으로 취급됐으며 하급자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이 요구됐다. 나치는 이 위계 구조를 당 내부에서 국가 행정과 사회 조직으로 확대해 청년단과 직업 단체에도 적용했다.[3]
정권은 사회의 여러 가치와 조직을 국가 목표에 종속시키려 했다. 당과 국가 기관이 점차 융합되고, 당의 고위 간부들이 정부 직책을 겸임하는 구조도 형성됐다.[3] 이러한 체계는 일당 독재와 전체주의 통치의 특징을 보여준다.[3]
3. 영토 확장과 전쟁
4. 유대인 박해와 홀로코스트
정권은 집권 직후부터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을 만들고 집단 폭력을 가했다. 1933년 베를린에서는 나치 돌격대가 유대인 소유 상점의 입구를 막고 불매를 촉구했다.[2] 이처럼 유대인 박해는 법과 공공장소의 폭력을 통해 유대인을 독일 사회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며 과격해졌고, 1941~1945년에는 유럽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로 이어졌다.[2] 1942년에는 폴란드의 게토가 체계적으로 비워졌고, 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에서도 유대인 검거가 시작됐다. 많은 이들이 기차에 실려 동쪽으로 보내졌으며, 대부분 도착 후 살해됐다.[1]
홀로코스트로 나치 독일 정권과 동맹국 및 협력자들은 유럽계 유대인 약 600만 명을 살해했다.[2] 관련 재판에서 동부의 소련계·발트계 유대인 약 150만 명에 대한 SS의 학살이 베를린의 권한과 인지 아래 이뤄졌다는 진술이 나왔다.[1]
5. 패전과 전범 재판
연합군은 1945년 5월 독일을 패배시켰고, 나치 정권은 종말을 맞았다.[2] 전후 연합국은 주요 나치 지도자들을 기소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는 헤르만 괴링을 포함해 24명이 기소됐다.[4]
피고들에게는 침략 전쟁을 다루는 ‘평화에 반한 죄’와 유대인 등 민간인 학살을 다루는 ‘반인도적 범죄’라는 죄목이 적용됐다.[4] 이 재판은 전쟁 전에는 없던 죄목을 다뤘고, 수백 명의 증인이 참여했다.[4]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고, TV 방송을 통해 널리 전해졌다.[4] 재판은 유대인 대학살의 실상이 알려지는 계기가 됐으며, 독일 내부에서 역사적 책임을 더 깊이 돌아봐야 한다는 여론에도 영향을 줬다.[4]